문성리뷰MoonsongReview

#리뷰 #예술 #여행 #서울 #일상

일상/아빠 집을 정리하며

유품정리Day25. 책정리. 아빠의 꿈, 환상 그리고 추억들을 나누다.

문성moonsong 2024. 11. 3. 21:06

단일품목으로는 가장 많은 갯수가 아닐까 싶은 품목이 바로 책이었다. 옷과 식기류 다음으로 나를 부담스럽게 만들었던 것도 역시 책이었다. 책은 쌓이면 무게가 상당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리 많은 짐이 아님에도 일인가구로 이사를 항 때마다 애를 먹인 것도 결국은 책이었기에 오십여년을 쌓아온 아빠의 책들은 부담을 넘어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아빠는 언니들이 떠난 방에도 내가 쓰던 방에도 서재를 만들어두고는 책을 나누어 보관하고 있었기에 두군데에서 책을 모으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기부는 불가능했다. 아빠가 갖고 있는 책들은 워낙 오래된 것들이 많아서 10년 이하만 받는 기부처에는 택도 없었고 인터넷을 뒤지며 찾아본 결과 헌책방에서도 사진부터 보내달라고 했다. 사진을 자세히 찍어서 보내고 나니 매입은 안 되고 무료수거만 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어디에서도 오래된 책을 받지 않는 듯 했다. 그 와중에 지방국립대조차 장서를 폐기처분하는 세태를 비판하는 기사를 읽고 절망했다. 이렇게 책이 쓸모없는 무엇이 누구도 찾지 않는 무엇이 되어가는구나. 아빠의 책들이 어딘가에서 환영받을리 만무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책까지도 가구와 함께 유품정리업체에 부탁할 것인지 아니면 책을 먼저 정리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무료수거를 하고 몇몇은 살아남기를 바라며 중고서적 거래업체에 다시 연락했다. 일단 집앞에 내다놓고 전체분량사진을 찍어주면 곧바로 가져가겠다는 답문자가 왔다. 절대로 혼자선 할 수 없는 일이라 언니들에게 이야기해서 주말 토요일 날을 잡았다.

주말까지 3층의 책들응 2층으로 내리고 토요일오후에 모여 책을 내렸다. 이회승의 국어대사전. 웹스터사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세계대문학전집. 철학사상사전집. 한국문학전집. 가곡전집. 언니들의 전공서적들. 원서와 학술서들. 그리고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사회과학서적과 교양서, 대중서들. 성경책과 찬송가들.
책을 내릴 때마다 아빠와의 어린시절의 장면들, 언니들과의 장면들, 엄마와의 순간들이 스쳐가고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섣불리 짚어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올라왔다. 11월 초 같지 않은 따스한 날씨에 온몸은 땀범벅에 팔에는 책에 스쳐난 생채기가 가득했다. 모두 다 내리고 나자 해가 이미 진 뒤였다.

다음날 일요일. 이른 아침 수거기사가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집앞에 차를 대고 문자를 보내셔서 대문을 열어 평상에 쌓인 책을 보여드렸다. 책이 정말 많네요. 놀란 목소리의 기사분에게 네, 많죠? 오랜 세월동안 쌓이다보니••• 대답을 하다 말끝을 잇지 못했다. 아빠의 부재를 이야기하지 못했다. 열심히 책을 분류해 쌓으시는 모습에 그럼 이제 책을 분류해서 가져가시면 다음은 어떻게 되나요 물었더니 아저씨가 망설이시다가 사실 꽤 많은 분량이 폐기돼요, 말씀하셨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국립대학도서관도 책을 폐기하는 마당에 아빠의 이 책들이 뭐가 대수이겠는가. 그럴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워낙 책을 읽지 않는 시대인가봐요. 그 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도 이후로 다섯군데를 들린다고 하셨다.

아빠의 책들로 나는 한글을 떼고 독서의 즐거움을 배웠고 몰래 언니들의 책을 훔쳐읽으며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었다. 아빠는 책을 소중히 여겼고 어린 내 눈에는 어떤 것들은 감히 손대기 어려울 정도의 신성한 무엇처럼 느껴졌었다. 지금 돌아보니 아빠에게 책은 세상과 연결되는 도구이자 우리를 가르칠 도구 나아가서는 우리가 얻게 될 지성과 권력 그리고 아빠가 그리던 꿈과 희망까지도 압축해서 보여주는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빠, 당신 덕분에 알게 된 독서의 즐거움. 내 삶에서도 중요한 버팀목이자 의지처 그리고 기쁨이었어요. 고마워. 그리고 이제 다른 이들에게로 보내요. 당신의 꿈과 희망 그리고 환상을. 당신이 기뻐해주길 바라요.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