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2018년 브런치에 올렸던 글을 정리하며 이 곳으로 옮긴 것이다.
브런치의 글들을 주제별로 정리하며 브런치에는 주로 전시와 문화예술작업들이나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업로드하고 이곳 티스토리에는 일상적인 경험과 아이디어들, 이제 뻗어나가는 관심사와 수집하는 정보들, 리뷰들을 모아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 먹고 나니, 지금까지 쓴 리뷰들도 이곳에 옮기는 게 좋겠다 싶었다. 다만 브런치에 있던 리뷰글들 중에서도 브런치무비패스프로젝트 작가로 쓴 영화평들 외의 리뷰들은 브런치와의 일종의 협업이라면 협업인 까닭에 브런치에 남겨두기로 했다.
환경에 대한 질문, 서울환경영화제
브런치 무비패스 덕분이었다. 서울환경영화제의 연락을 받게 된 것은.
어느날 메일함을 열어보니 초대장이 와 있었다. 무비패스로 영화를 보고 브런치에 남긴 리뷰들을 읽고 서울환경영화제 티켓을 주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제안을 받아도 될 만큼 제대로 된 리뷰를 남겼던가 얼떨떨해 하면서도 제안에 감사하다는 답메일을 보내고 다이어리에 환경영화제 기간을 옮겨적었다.
쫓기듯 닥친 일을 처리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던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컸고 영화제가 오랜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서울환경영화제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기에 어떤 영화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궁금했다. 그렇다. 호기심이 바쁜 일정도 할 일들도 피곤도 미루고 굳이 서울환경영화제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영화제날짜가 다가오는데도 연락이 없어 홈페이지에 들어가보았더니 영화제의 일정도 영화제에 상영되는 영화의 라인업도 제대로 클릭이 되지 않았다. 과연 제대로 열리는 게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는데 재미있는 건 서울 환경영화제는 2018년도 올해에 벌써 15번째 열리는 행사였다. 분명 행사를 주최하는 측에서 여러가지 부침을 겪어왔을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사를 치뤄왔을 테니 올해에도 역시 그렇지 않을까 짐작하며 기다린 며칠이 지나자 서울극장에서 티켓교환권을 받아가라는 문자가 왔다.

5월 중반을 넘어선 어느날. 대학원에서는 과제와 발표, 맡은 업무에서는 행사와 업무처리가 밀려드는 와중이었다. 마지막으로 온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종로3가 지하철역에서 올라와 대한극장으로 가는데 지하철역과 극장 사이 그 짧은 거리에 계란빵, 쥐포, 오징어, 문어, 군밤을 파는 포장마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눈부신 햇살 아래로 사람들이 조금은 들뜬 듯 걷고 있었다. 상점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거리를 배경삼아 극장으로 걸어가면서 나의 어린시절 종로3가와 대한극장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적어도 중학교 때까지 종로3가와 명동은 나의 세계에선 가장 화려하고 번화한 중심가였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면 단지 수많은 사람들 속의 한 명이 되어 걷고 싶어 친구들과 찾아와 주변의 모든 것들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두리번거리곤 했었다. 멀티플렉스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에 처음으로 여러 상영관을 갖추어 유명세를 떨쳤던 서울극장의 화려함에 할 말을 잃고 바라보았던 기억. 바로 그 서울극장이 쇠락해가는 것을 더 보지 못하고 어느 순간부터 찾지 않았던 종로3가의 그 자리에 서울극장은 새로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요즘의 CGV나 메가박스처럼 세련된 외양을 갖추고 1층에는 독립영화전용 상영관과 심지어 스타벅스까지 입점해있는 풍경에 갑자기 세련된 모습으로 나타난 친구를 눈을 비비고 바라보듯 어색해하며 영화관에 들어섰다.
하지만 극장 안은 영화제가 열리는 곳 답지 않게 한가로웠다. 복합몰의 체인멀티플렉스와 달리 비어있는 구석이 많았고 중년을 훌쩍 넘어선 어르신들도 많았고 심지어 어디선가 희미하게 담배냄새가 느껴졌다. 5층 영화제 전용 창구에서 티켓을 바꾸고 영화제안내책자를 받아 창가의 텅빈 자리에 앉아 종로3가에서 5가, 청계천으로 뻗은 상가와 사람들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이런 느낌이었지, 어린 시절의 감각들이 되살아나며 반가움, 안타까움, 기쁨, 아련함, 슬픔, 여러가지 감정들이 뒤얽히는 걸 느꼈다. 오랜 시간 서울의 영화관으로서 역사를 품고 버텨온 이곳 서울극장에서 서울환경영화제를 상영하는 게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는 프로그램을 찬찬히 읽으며 섹션이 어떻게 나뉘어져있는지, 제목과 소개만을 보았을 때 눈길을 끄는 영화들이 무엇인지, 그 중에서 내 스케줄에 볼 수 있는 것들이 몇 개인지, 누구에게 남은 티켓을 줄 수 있을지, 내가 원하는 영화들을 예매하려면 스케줄과 동선을 어떻게 짜야할지 궁리했다. 그렇게 고른 영화는 다섯 편이었지만 결국 스케줄 조절에 실패해 하나를 보지 못하고, 네 편을 보았다.
그랑블루: 자끄 미욜의 삶, 리틀 포레스트, 토마토제국, 옥자.
내가 고른 영화들 중 첫번째, 그랑블루: 자끄미욜의 삶의 원제는 돌핀맨. 영화제의 주제별 섹션 구분 중에는 "꿈꾸는 사람들"에 분류되어 있었다. 자끄미욜은 유명한 뤽 베송의 영화, 그랑블루를 만드는데 영감을 준 실제 인물로 세계신기록을 몇 번이나 갱신한 프랑스의 전설적인 무호흡 프리다이버였다.
나는 그의 이름과 그가 프리다이버라는 것만을 알고 있었다. 푸른 바다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고자 했다는 것만을. 그리고 영화는 그가 어떻게 그와 같은 특별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의 일생을 남은 기록과 주변인물들과의 인터뷰, 무엇보다도 그가 유영하던 바다를 통해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였다.

나는 물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었던 어린시절을 극복하고 싶어 20대 중반이 지나서야 수영을 배웠고 두려움을 참고 호흡과 자세를 배우며 물속에서 있는 순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마치 엄마의 뱃속에 들어있는 것 같은, 혹은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은,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충동으로 수영장, 계곡, 강물, 바다를 향하면서 한편으로는 원초적인 두려움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걸 느끼기도 했다. 닿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아득함, 곧바로 온몸을 감싸는 차가운 수온, 햇살이 닿지 않아 짙푸른 색으로 달라지는 깊은 바다, 계속해서 헤엄치지 않으면 그 속에 집어삼켜질 것 같은, 망망대해 속의 한 점이 되어버리는 그 느낌.
그 충동과 두려움을 간직한 바다 속으로 자끄 미욜은 들어가고 또 들어갔다. 블루 홀로 천천히 낙하하는 프리다이버의 모습이 스크린에 펼쳐졌을 때, 그 단 한 장면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만 했다고 만족했다. 여러 여자와의 염문, 동료들을 이용하고 스타로서의 모습에 취해있던 어찌보면 지리멸렬한 삼류스토리와도 같은 일상적인 삶 너머 돌고래와 교감을 나누고 다른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호흡으로 바다 속의 일부가 되고자 했던 그 집념과 탐구, 헌신. 프리다이버의 세계가 면벽을 한 수도승과도 같은 자기수양이자 인간정신의 극한의 탐험이 될 수 있게 한 어떤 사람. 푸른 바다속을 돌고래와 함께 유영하는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두번째로 고른 영화는 리틀 포레스트. 임순례 감독의 영화. 일본만화가 원작이고 이미 성공한 일본영화가 있음에도 선택한 그 이유를 알고 싶었고 과연 영화는 어떤 모습을 담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그랑블루를 보고 극장 밖으로 나가 지기 전의 부드러운 햇살을 즐기고 영화관 앞의 오징어 다리를 사서 씹으며 바람을 쐬자마자 곧바로 들어가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줄을 잇는 영화를 보는 것도 영화제의 묘미.
눈이 피곤한 걸 느꼈지만 영화가 시작되자 졸음도 피곤도 참을 수 있었다. 소복히 쌓이는 눈발 속의 겨울풍경으로 시작해서 봄을 맞고 여름을 지내고 가을 다시 겨울이 지나 봄을 맞으며 끝나는 영화 내내 스크린 가득히 펼쳐지는 사계절을 사치스러울 정도로 누릴 수 있었다. 시각과 청각에 기대 표현하는 색, 질감, 촉감, 맛, 소리가 어우러지는 공감각들. 풍경과 음식으로 풀어나가는 소박한 척하지만 사실은 너무나 풍성한 장면들이 흘러가는 것에, 그것을 아껴가며 즐길 수 없음에 아쉬움을 느끼며 최대한 그 성찬을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정신없이 스크린의 아름다움에 골몰하면서 한편으론 자꾸만 반문이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오래된 시골집이 난로만으로는 따뜻해질 수 없을 만큼 춥다는 것을, 얇은 창호지와 한장짜리 유리로는 어림없는, 흔들리는 창문으로 파고드는 냉기와 찬바람이 살갗을 애는 고통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 게 얼마나 겨울을 낭만적으로 보이게 하는가. 봄비로 녹은 얼음과 진창이 되어버린 흙길이 얼마나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지 젖었다 말랐다 반복하는 길을 걷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지는 보여주지 않는 게 봄을 얼마나 포근하게 보이게 하는가. 상수도와 하수도가 없이 지하수를 쓰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지, 한여름에 달려드는 벌레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주지 않는 게 얼마나 여름을 환상적으로 보이게 하는가.
단기간의 농활을 하면서도 견딜 수 없었던 그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찌는 듯한 더위에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되곤 했던 작업복과 새카맣게 타버린 얼굴, 끊임없이 달려들어 온몸에 자국을 만들어놓았던 벌레들. 퇴비와 가축들과 야외화장실의 냄새. 어르신들이 권하던 미지근하던 소주와 막걸리의 시금털털한 냄새와 농약냄새. 영화 속에 펼쳐지던 감각들도 내가 농촌에서 겪었던 순간들이었지만 농활과 함께 되살아나는 감각들도 역시 내가 농촌에서 겪었던 순간들이었다. 영화가 느릿한 자연의 사계절과 함께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는 위로를 하고 싶었다고 그 미학을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면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아름다움을 느꼈노라고 그 풍경들과 음식들에 입맛을 다시고 시각적 쾌감을 느꼈노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는 위로로 느껴지지는 않았노라고 고백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아름다움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감각을 잃는 건 너무나 위험한 일이 아니냐고.

세번째로 고른 영화는 어쩌면 그런 반문에 대한 답과도 같은 영화였다. 우리가 먹는 토마토가 어쩌다가 전세계적인 규모의 시장과 그 시장을 겨냥한 산업의 품목이 되었는지 그리고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는지를 적나라가 추적해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이자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로 세계의 식량이 어떻게 좌지우지되는가를 토마토를 통해 보여주는 일종의 토마토를 통해 본 미시사라도 할 수 있었다.

토마토농장을 소유한 중국의 기업가의 자신만만하고 기대에 찬 얼굴. 앞으로 중국의 젊은 세대가 토마토에 익숙해지면 소비하게 될 토마토의 양에 대해 설명하며 만족스럽게 웃는 모습과 중국의 우루무치와 같은 서안으로 흘러흘러 들어와 끝없이 토마토를 수확하는 소수민족들, 아프리카를 떠나와 이탈리아에서 끝없이 토마토를 수확하는 불법노동자들의 모습이 영화보다도 영화처럼 대비가 되고 있었다. 그늘 한 점 찾을 수 없는 토마토농장 한복판에 서서 햇살에 눈을 찌푸린 채로 인터뷰를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토마토 케첩과 토마토소스 통조림이 얼마나 멀고 먼 길을 돌아 마트에 진열되는가를 가늠해보다가 아찔해졌다. 마트에서 가급적 물건을 사지 않으려고 하지만, 대기업제품을 되도록 쓰지 않으려 하지만, 탄소발자국이 많은 물건을 고르지 않으려 하지만, 과연 내가 그것들에서 얼마나 멀어질 수 있을까. 아득했다.

마지막으로 본 영화. 옥자는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가. 다음 질문을 하는 영화이자 그 다음을 함께 그려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하는 듯 했다. 코믹하고도 섬뜩한 우화에 가까운 픽션임에도 다큐멘터리가 관객을 향해 던지는 직설적인 나레이션보다도 더욱 강렬하고도 적나라하게 묻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글로벌화된 식량생산의 시스템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것의 적나라한 문제를 드러내는 단편을, 대규모의 공장식 축산업을 용인할 것인가. 교감을 나누는 동물을 친구로 대할 것인가 아니면 가축으로 대상화할 것인가. 생명윤리를 어디까지 적용해야할 것인가. 동물을 친구로 대한다고 해도 결국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그 방법을 마련해야한다면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의 거대한 소동극이자 캐릭터쇼와도 같은 영화는 스펙터클한 재미도 있었고 블랙코미디의 실소도 자아내며 흥미진진하게 흘러갔다. 다만 제이크 질렌할과 틸다 스윈턴의 캐릭터의 우스꽝스러움을 넘어 기괴함을 자아내는 과장된 캐릭터가 블랙코미디보다는 미국적으로 과장된 캐릭터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전형성을 보여주는 게 못내 아쉬웠다. 할리우드 슬랩스틱에서 흔히 보이는 멍청한 과학자의 외양에 행동거지의 질렌할, 부모의 무시를 당하고 꼬일대로 꼬여버린 루저로 묘사되는 스윈턴은 옥자를 찾으려고 고군분투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가며 미자가 뿜어내는 자연스러운 감정들때문에 더더욱 경직되고 어색하게 삐그덕댔다. 어쩌면 일부러 그 전형성을 대비하며 우화로 그 무게를 덜려고 한 것이었을까. 궁금해졌지만 답을 알 수는 없었다. 어쩌면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야말로 영화가, 작품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비패스 덕분에 또 하나의 무비패스를 얻어 이틀간의 탐험을 한 셈이었다.
어떤 태도로 환경을 탐색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어떻게 그 속에서 즐겁게 살아갈 것인가,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그 환경으로 이어져 있음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하든 결국은 환경에 관한 끝없는 질문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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